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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함께 신칼뱅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바빙크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기여는 전 4권으로 이루어진 『개혁교의학』입니다. 카이퍼가 현대 세계를 위해 개혁신앙을 새롭게 소환하는 광맥을 발견한 금광 채굴자였다면, 바빙크는 그 원석을 정교하고 아름다운 신학 체계로 빚어낸 금세공사였습니다. 『개혁교의학』은 신칼뱅주의 전통의 신학대전(Summa)으로 불려 마땅한 작품입니다. 1880년대 초부터 구상하기 시작해 1895년 제1권을, 그리고 1901년까지 전 4권을 완성하고, 이후 수년에 걸쳐 대폭 개정한 이 방대한 저술은, 성경의 권위에서 출발하여 역사신학적 깊이와 현대 사상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개혁신앙 전체를 체계적으로 해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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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빙크를 단순히 '교의학자'로만 규정하면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타고난 철학자", "개혁신학의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
"신학자이자 과학적 교육학자", 
"근대 칼뱅주의 교육학의 철학자"
"역사가", "심리학 전문가"
"언론인, 의회 정치인" 
"여성 교육권 및 여성 참정권의 옹호자"

실제로 바빙크는 신학 외에도 심리학, 교육학, 문학비평, 철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발히 저술하며 네덜란드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0년에는 기독교 신문 De Bazuin의 주필을 맡았으며, 훗날 의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은 그의 한결같은 신념, 곧 "그리스도의 주권을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하고 싶다"는 소명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빙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의 관심이 넓고 깊었기 때문입니다. 신칼뱅주의라는 운동 자체가 신학·철학·정치·언론·사회운동·예술·과학을 아우르는 운동인데, 바빙크는 그 모든 영역을 자신의 삶 안에서 하나로 구현한 인물입니다. 그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신칼뱅주의의 지형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눈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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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섯 개의 키워드를 통해 바빙크의 정체성과 뿌리, 방법론과 대화, 극복과 종합, 그리고 시야의 넓이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디를 향하는가? 바빙크의 신학이 도달하려는 최종 목적지는 무엇인가?  쉬미언 쉬의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한 핵심적 답을 제시한다. 그는 바빙크의 학문적 신학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근거 가운데 마지막을 송영적 목적론(doxological teleology)이라고 명명했다. 신학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격언이 아니다. 쉬에 따르면, 송영적 목적론은 신학의 지적 본성과 찬양적 본성의 상호침투를 통해 실현된다. 학문적 탐구와 예배적 경건이 서로 스며드는 것이다. 바빙크는 깜펀 취임 연설에서 “신학의 가장 거룩한 최상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뿐이며, 다른 목적은 거기에 종속된다”고 선언했다. 신학자의 영적 성장도, 교회의 건설도, 학문의 발전도, 모두 이 궁극적 목적을 향해 수렴한다. 마스트리흐트가 “신학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고, 두 번째 목적은 우리의 구원”(고전 10:31; 롬 11:36; 벧전 1:9)이라고 진술한 것을 바빙크가 계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빙크에게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학문이다. 이 영적 지향은 바빙크의 계시 이해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바빙크는 Deus Dixit(하나님이 말씀하셨다)를 모든 기독교 학문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이 원리는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주의를 비판하는 인식론적 토대로 기능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원리에는 인식론을 넘어서는 더 깊은 차원이 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실증적인 종교다.” 바빙크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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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펀의 신학자 깜파위스 교수는 보편성 개념이 바빙크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빙크가 말하는 보편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왜 중요한가? 바빙크는 보편성을 논할 때 결정적인 구분 하나를 먼저 세운다. 보편성은 획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보편성이 다양성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다양성 안에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보편성은 기계적 통일이 아니라 풍요로움, 다면성, 다원성으로 구성된다. 모든 것을 하나의 틀로 찍어내는 것이 보편성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시대와 민족 속에서 동일한 복음이 각기 다른 형태로 꽃피는 것이 참된 보편성이다. 이 구분은 바빙크의 개혁주의 정체성과 직접 연결된다. 거짓 보수주의가 획일성을 강제하는 반면, 참된 보수주의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의 형태를 취한다는 원리가 여기서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바빙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기독교 신앙은 자연적 영역 위에 초월적으로 덧씌워지는 양적 실재가 아니라, 자연적 영역 안으로 내재적으로 스며들어 오직 거룩하지 않은 것만을 정화하는 종교적, 윤리적 힘이라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를 예수님의 비유를 빌려 설명한다. 천국은 보물이나 값진 진주인 동시에 겨자씨와 누룩의 성격도 지닌다(마 13:31-33, 44-46). 값진 진주는 기독교 신앙이 가진 절대적 가치를 가리키고, 겨자씨와 누룩은 세상 안으로 스며들어 모든 것을 변혁시키는 내재적 힘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세상과 담을 쌓고 따로 사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역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안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종교이다. 바빙크에 따르면 기독교는 모든 상황과 자연적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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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4항목 '이원론 극복'에서는 바빙크의 해결 원리를 살펴보았다. 삼위일체적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원리가 그 열쇠였다. 그렇다면 이 원리는 바빙크의 신학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는가? 이원론을 극복한 자리에 바빙크가 세운 것은 무엇인가? 브루스 패스의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한 핵심적 답을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바빙크의 신학 체계 전체를 하나로 묶는 중심은 기독론이다. 바빙크 자신이 기독론을 교의학의 심장이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에 패스는 주목한다. 바빙크의 신학이 ‘기독론 중심적’이라는 점 자체는 널리 인정되어 왔으나,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기독론 중심적인지는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 패스는 이를 세 가지 차원에서 해명한다. 우선, 바빙크는 디모데전서 3:16을 기독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이 본문이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실재와 이상, 시간과 영원을 조화시키는 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고 분석한다. 다음으로, 바빙크에게 다른 모든 교리들은 기독론을 준비하거나 기독론으로부터 추론된다. 성경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 기독론을 향해 수렴하거나 기독론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패스는 기독론이 바빙크의 사상에서 정통신학과 근대성이 만나는 접점이라고 본다. 기독론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 초월과 내재가 한 인격 안에서 만나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 분리 없이, 혼합 없이 하나가 된다(칼케돈 신조). 바빙크의 유기적 종합이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인격,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 기독론적 중심은 바빙크의 인식론에서도 작동한다. 수탄토는 바빙크의 인식론을 개혁주의 유기체적 실재론(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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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 연구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지배적 가설이 있었다. 바빙크 안에는 두 명의 바빙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충실한 ‘정통적 바빙크’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 관념론과 현대 신학에 이끌린 ‘현대적 바빙크’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바빙크의 저작에서 신앙고백적 내용이 나오면 정통적 바빙크의 작품이고, 현대 사상과 대화하는 부분이 나오면 현대적 바빙크의 작품이다. 얀 페인호프는 이를 “두 바빙크들”과 “두 극들”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했고, 말콤 야넬은 바빙크 신학 연구를 “정신분열증”이라는 불행한 언어로 기술하기까지 했다. 브렘머와 반틸도 이러한 이원론적 해석의 틀 안에서 바빙크를 읽었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정당한 것인가? 바빙크 안에는 정말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자아가 있었는가? 이 물음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것이 에글린턴의 박사논문 『삼위일체와 유기체』이다. 에글린턴의 발견은 명료하다. 바빙크의 유기체적 사고는 19세기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에글린턴이 제시한 해석학적 원칙은 “삼위일체의 내재성에서(ad intra) 유기체의 외재성(ad extra)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 방식이 피조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뜻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한 분이시되 세 분이시고, 세 분이시되 한 분이시다. 바빙크에게 이 삼위일체적 ‘다양성 속의 통일성’은 단순한 교리 조항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 원리였다. 하나님 안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듯, 피조 세계도 서로 다른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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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가 신학자로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신학은 그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 도전은 외부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신학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바빙크가 마주해야 했던 도전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으며, 그는 이에 어떻게 응답했는가? 가장 직접적인 도전은 1876년 네덜란드 고등교육법이었다. 이 법은 대학의 신학부를 종교학부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으로서 대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 왔으나, 이제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서의 '종교'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재정의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신학부라는 이름은 유지되었지만, 실제 가르치는 내용은 종교연구 프로그램이 되었다. 페트루스 틸러 같은 학자는 종교를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인간 정신의 표현으로 정의하면서, 귀납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에서 인간의 종교 현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도전의 배후에는 자연과학과 실증주의의 부상이 있었다.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칸트는 인간의 지식 범위를 경험 세계에 한정시킴으로써 신학을 학문의 영역에서 축출했고, 피히테는 학문적 교사의 직분을 가장 높은 소명으로 보면서도 이를 세속적 의미의 학문성에 국한시켰다. 바빙크는 이들이 학문의 본질을 지나치게 좁게 정의했다고 비판하면서도, 과학적 방법론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늘날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연구 방법은 뛰어난 결과를 통해 그 정확성을 입증했으며, 우리의 동의 또한 요구할 만합니다”라고 인정했다. 과학적 방법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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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는 홀로 선 신학자가 아니다. 그의 신학에는 교부시대에서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이르는 하나의 긴 줄기가 관통하고 있다. 바빙크 연구가인 에글린턴은 바빙크의 유기체적 사고가 흔히 추정되어 온 19세기 독일 관념론 철학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 전통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교부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과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 발견은 바빙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빙크는 구체적으로 어떤 전통을 물려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신학 안에 살려 냈는가? 바빙크가 가장 깊이 의지한 유산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다. 바빙크의 개혁주의 정체성에서 그가 윤리학 강의에 이 전통의 용어를 수용한 점을 살펴보았는데, 교의학에서는 그 수용이 한층 본격적이다. 특히 투레티누스가 제시한 신학의 이중적 원리(duplex Theologiae principium)는 바빙크 교의학의 골격을 형성한다. 투레티누스에 따르면, 신학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로서의 하나님 자신과,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빙크는 이 구도를 통해 신학의 출발점을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확고히 세웠다. 또한 게레로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바빙크는 깜펀 신학교 강의노트에서 유니우스와 『순수 신학 통론』의 서론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직접 수용했다. 신학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으로 나누고, “참된 신학은 원형적이거나 모사적이다”라고 정리한 것이 그 예이다. 이것은 바빙크가 17세기 개혁파 신학의 엄밀한 방법론을 의식적으로 자기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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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빙크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가리킬 때 '정통'(Orthodox)이라는 말 대신 '개혁주의'(Gereformeerd)라는 이름을 일관되게 선호했다. 이 선택은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형성한 신학적 정체성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바빙크의 개혁주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은 어떤 내용을 지니는가? 이 정체성의 뿌리는 아버지 얀 바빙크(1826–1909)에게서 시작된다. 얀은 1834년 분리파(Afscheiding) 운동의 영향 아래 형성된 독일 벤트하임의 옛 개혁교회 목사였다. 분리파는 계몽주의에 지배당한 네덜란드 국가교회를 떠나 개혁주의 교리와 경건한 삶의 회복을 추구한 운동이다. 이들이 원한 것은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종교개혁이 본래 세운 교회의 '옛 모습'이었다. 그런데 1848년 유럽 혁명 이후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면서, 이 '옛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현대 사회 안에서 공적 기관으로 다시 태어나는 역설이 발생했다. 얀은 바로 이 긴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선반공으로 현대 산업 사회를 직접 경험한 그는 분리파의 교리적 유산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도전을 외면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정통 신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현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헤르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질문이며, 분리 운동 초기부터 이미 핵심적인 물음이었다. 헤르만의 교육 경로가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분리파 전통의 깜펀 신학교에서 1년 정도 공부를 시작한 뒤 현대 신학의 중심지인 레이든 대학교로 건너갔다. 깜펀의 교수 브룸멀깜프는 아버지 얀의 이 결정을 "부적절하고 꼴사나운" 행동이라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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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조용하지만 깊은 물음이 흐르고 있다.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 앞에서 어떤 이들은 개혁신학을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기고, 또 어떤 이들은 현대와 단절된 보수적 고집으로 오해한다. 그런가 하면 개혁신학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것이 오늘날의 삶과 학문과 문화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막막하게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귀한 길잡이가 된다. ​ 바빙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개혁파 교의학자이다. 그는 방대한 『개혁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을 저술하여, 종교개혁의 유산을 학문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자기 시대의 지적 도전들과 정직하게 마주한 신학자였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바빙크 사상의 특징들을 일곱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여, 바빙크가 어떤 신학자였으며 그의 신학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먼저 전체적인 개관으로서 일곱 가지 키워드를 간략히 소개한다. 바빙크 신학의 일곱 가지 키워드 첫째는 개혁주의 정체성(Reformed Identity)이다. 바빙크는 자신의 교의학 작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의식적으로 개혁교회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게 교의학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안에서 교회에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학문적 체계였다. 그는 성경을 신학의 원리로 견지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신앙고백 전통 안에 서 있고자 하였다. 그가 주관주의 신학에 맞서 싸운 것도, 로마 가톨릭의 전승주의에 반대한 것도, 모두 이 개혁주의적 출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빙크에게 개혁신학자란 성경에 근거하되 교회의 역사적 고백과 분리